정몽주는 단심가로서 자신의 굳은 뜻을 표명했다는 이야기이다.
하여가와 단심가는 현전 시조집 중에서 가장 시조의 작자를 믿을 수 있는 김천택이 엮은 원본인 청구영언에도 작자가 이방원과 정몽주로 나타나 있어 비교적 믿음성이 있는 것이다.
조선초기의 시조라는 것도 태반 믿음성이 박약하다
시조음악의 변화를 주도하고, 가곡 중심의 연행문화를 형성하며, 가집을 편찬하는 등 조선 후기 시조문학의 변화에 주도자 역할을 하였다. 가객은 18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시조를 가창하면서 시적 재능을 가지고 창작자로서도 활동한 김천택, 한유신 등 가객 시인과 전문 음악가로서 가창을 주로 하던
시조의 음악적 측면에 대한 부분은 논외로 하고 중인가객시조의 국문학적 측면에서의 족적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사설시조는 다음 조에서 다루게 될 것이므로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범위 내에서 중인가객들에 의해 편찬된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삼대 가집에
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위치가 변화하게 된다. 즉 양악이 번창하고 자유시가 한국 시단을 풍미할 때 일어난 시조부흥 운동을 계기로 음악적인 요소와는 달리 문학사적인 위치를 정립하게 된다. 최남선은 시조부흥운동을 통해서 시조시집 『백팔번뇌』(1920)를 펴내고 시조를 이전 가집에서 곡조와 작가
가곡창 5장으로 불러오던 것에서 파생하여 3장의 시조창으로 성립된 것이다.
또한 시조를 ‘가곡창사(歌曲唱詞)’라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삼대 가집은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는 가곡집으로서 거기에 실린 노래들은 가곡의 노랫말이기 때문에 가곡창사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규익,
시조문학의 전개 양상」, 고대 박사학위논문, 1996
은 18세기가집의 편찬 과정을 18세기시조사의 구도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통시적으로 고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집 편찬의 시간적 흐름 속에서 사대부들의 작품 활동과 그 작품 세계의 특성을 검토하였다. 흔히 18세기 초반, 진본『청구영언』이 편찬
시조 작가 군(群)으로 등장하여 장단의 시조로 진솔한 감정의 가식 없는 유로(流露)를 통해 시작(詩作)과 가창을 병행시켜 나가게 된다. 이런 변화와 함께 조선 후기에는 많은 가집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시조집으로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 박효관·안민영의 「가곡원
시조의 형태상의 특징은 또한 종장 마지막 마디의 생략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기존의 연구 결과는 종장 마지막 마디의 생략을 조선조 시조창의 전통을 이은 결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생략 현상이 조선조 후기의 가집인 南薰太平歌에 게재된 시조의 종장 처리 방식과 동일하
가곡원류>(1763, 영조 39년)
<청구영언>, <해동가요>뒤에 나타난 시조문학의 총결산 시조집으로 박효관, 안민영이 편찬함. 시조집 명칭이 <가곡원류>, <청구악장>, <가사집>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시조집이 원본을 찾는 일과 명칭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2. 기타 가집
1) <고금가
조선 초기 형태 완성'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앞선 논의와는 차이가 있다. 또 이러한 논의에 반발하여 조선시대 발생설도 지속적으로 제시되어왔는데, 시조의 조선시대 발생 가능성을 제기한 이능우의 견해 이후로 조선시대 발생설은 대략 권두환의 15세기 발생설과 성호경의 15세기 말엽 발생설, 16세